도시정비

[인문학 칼럼] 세한도에서 발견한 심미안과 삶의 품격

최종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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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에는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오르는 것만이 성공인 줄 알았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했고, 타인의 시선과 세간의 평가에 마음을 빼앗기며 휘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삶의 질문이 바뀌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랐는가 보다 ‘무엇을 지켜냈으며, 누구와 함께 걸어왔는가.’

 

1844년, 제주도 절해고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는 제자 이상적에게 그림 한 점을 그려 보냈다. 바로 『세한도(歲寒圖)』다. 화폭에는 갈필로 그린 초라한 집 한 채와 메마른 고목 몇 그루가 전부다. 화려한 채색도, 수려한 풍경도 없다. 그러나 그 서늘한 여백 뒤편에는 말로 다 못 할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권세를 잃고 귀양살이를 하는 스승을 세상은 외면했으나, 역관이었던 이상적만은 잊지 않았다. 북경을 오가며 구한 귀한 서책들을 유배지로 부치며 변함없는 사제의 정을 바쳤다. 추사는 『논어』의 구절을 빌려 그 마음에 화답했다.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사람의 인연도 다르지 않다. 부귀와 영화가 머물 때는 주변에 사람이 넘쳐나지만, 혹독한 계절을 맞았을 때도 변함없이 손을 내밀어 줄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세한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폭 속 소나무가 아니라, 모진 역경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알아보는 눈, 그것이 바로 ‘심미안(審美眼)’이다. 이는 예술품을 감상하는 안목을 넘어 일상의 소박한 기쁨을 발견하고, 사람의 진심을 분별해 내는 삶의 태도다. 화려한 언변이 곧 진실을 뜻하지 않으며, 투박한 외양이 그 사람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도 못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것’과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질투를 덜어내면 타인의 기쁨이 보이고, 욕심을 비우면 이미 곁에 머문 것들의 소중함이 드러난다. 우리 삶의 황혼 역시 그러하다. 깊게 파인 주름에는 치열했던 계절이, 느려진 걸음에는 묵묵히 건너온 생의 서사가 깃들어 있다. 심미안은 세상에 없는 허상을 좇는 눈이 아니라, 이미 내 곁에 묵묵히 머물러 온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김정희가 이상적의 맑은 지조를 알아챘다면, 이상적은 그 진심을 우직한 행동으로 증명해 냈다.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이 심미안이라면, 그 아름다움을 살아내는 것은 ‘행위의 미학’이다. 진심은 행동으로 드러나며, 그 행동은 살아온 삶의 책임으로 남는다.

 

『세한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내 삶의 혹독한 겨울, 내 곁을 지켜준 이는 누구였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누군가의 겨울에 어떤 온도로 머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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