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엽의 시사평론] 구도심의 비명과 대비되는 1기 신도시 재건축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소방차 한 대 진입하기 어려운 골목길
. 밤이면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해 이웃 간의 고성이 오가고, 낡은 배관에서는 매일 아침 녹물이 쏟아진다. 대한민국 구도심 노후 주거지에 사는 평범한 원주민들이 매일 마주하는 처절한 ‘생존 현실’이다.

정비사업의 본질이 주거 환경 개선과 인간다운 삶의 보장에 있다면, 지금 정부의 눈길은 먼저 어둡고 좁은 구도심 골목길을 향해야 한다. 하지만 도시의 뿌리인 구도심은 철저히 홀대 받고 있으며, 그들의 비명은 화려하게 울려 퍼지는 ‘1기 신도시 축제’의 폭죽 소리에 묻혀 있다.
■ 정책과 자본에서 홀대 받는 구도심의 ‘각자 도생’
지금 구도심 재개발 구역이 겪고 있는 비극은 참담하다. 고금리와 공사비 폭등이라는 한파 속에서, 구도심은 아무런 보호막 없이 맨몸으로 시장의 냉기에 노출되어 있다. 대형 시공사들은 사업성이 떨어진다며 구도심의 재개발 입찰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정비사업 자금(PF)줄은 막혀버렸다.
첫 삽을 뜨기는커녕 시공사조차 구하지 못해 표류하는 구역이 부지기수다. 원주민들은 분담금 폭탄의 공포와 사업 중단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채, 오직 ‘각자도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비극의 극대화는 정부가 띄운 ‘1기 신도시 특별법’
정부는 공급의 효율성과 표심이라는 계산기만 두드린 채, 이미 격자형 도로망과 공원, 지하철 등
완벽한 인프라를 갖춘 신도시 지역에 ‘안전 진단 면제’와 ‘파격적 용적률 완화’라는 프리패스 티켓을 쥐여주었다.
자본과 대기업 시공사들이 리스크가 없고 혜택이 쏟아지는 신도시로 대거 쏠리는 ‘자본의 블랙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결국 살만한 신도시 아파트들이 정부의 특혜 속에서 축제를 벌이는 동안, 정작 당장 개발이 시급한 구도심은 정책적 사각지대에서 철저히 소외 당하며 슬럼화의 길을 향하고 있다.
■ ‘공공’의 탈을 쓴 또 다른 폭력, LH 도심복합사업의 늪
구도심 원주민들을 더욱 절망케 하는 것은 민간이 외면하자 정부가 대안으로 밀어붙인 LH주도의 ‘도심공공주택복합사업’이다. 이 사업은 구도심 구원투수가 아닌, 원주민들의 손발을 꽁꽁묶는 ‘공공의 족쇄’로 돌아왔다.
‘신속한 주택 공급’이라는 명분 아래 원주민들의 재산권은 철저히 제한되었다. 감정평가라는 미명 하에 턱없이 낮게 책정된 현물보상 가격은 ‘헐값 보상’의 논란을 낳았고, 사업 막바지에 폭등한 공사비는 ‘분담금 폭탄’으로 이어졌다.
수십 년간 내집 한 채 쥐고 살아온 원주민들은 분담금을 감당하지 못해 정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투기 방지를 이유로 가해진 엄격한 현금청산 규제와 지위 양도 제한은 집을 팔고 떠날 자유마저 박탈당했다.
인프라가 풍족한 신도시에는 온갖 규제를 풀어주면서, 정작 낙후된 구도심에는 공공성을 들이대며 주민들의 사유재산권 제약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기만적인 ‘이중 잣대’야말로 구도심이 마주한 가장 아픈 홀대의 단면이다.
■ 도시의 균형 감각을 상실한 정부에게 묻는다
정부의 공급 정책이 가진 현실적 필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대량 공급을 위해 신도시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효율성이 정의가 될 수는 없다. 모든 관심과 자본이
신도시 재건축이라는 화려한 무대로 쏠리는 사이, 우리 도시의 허리이자 허름한 뿌리인
구도심의 불은 하나둘 쓸쓸히 꺼져가고 있다.
이대로 구도심의 슬럼화를 방치한다면 인구 유출과 도심 공동화, 치안 악화라는 더 큰 부메랑과 사회적 비용이 되어 국가 경제 전체를 위협할 것이다.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화려한 얼굴(신도시)만 가꾸고 몸통과 허리(구도심)를 썩게 놔둔다면 그 도시는 결코 오래 생존할 수 없다.
정부는 눈앞의 표심과 효율성 중심의 눈먼 정책에서 벗어나야
구도심 재개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용적률 완화, 국비 지원을 통한 인프라 확충, 그리고 LH 도심복합사업의 독소조항 전면 개정과 같은 구체적인 구도심 살리기 패키지를 즉각 시행해야 한다.
화려한 신도시 뒤편, 소외된 구도심의 짓밟힌 비명에 귀를 기울이는 ‘균형 감각’을 되찾는 것은
대한민국 도시정책이 마주한 가장 시급한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