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사상이 머물다 간 자리

1월의 끝자락, 영등포의 밤은 사유보다 먼저 얼어붙는다. 낡은 전선들이 칼바람에 울어 대는 가로등 빛은 제 몸을 접어 파랗게 움츠린다. 그 골목 안쪽의 작은 주점에는 네명의 사내가 소주병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이 자리는 각자의 삶을 버텨온 인간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의 성격이었다.
첫 잔은 사업의 이름으로 잔을 들었다. 비전과 방향, 효율과 성과가 술잔의 의미를 더했고 잔이 몇 차례 더 오가자 그 언어들은 자연스럽게 밀려 친밀도 높은 용어로 치환되었다. 더 설명해야 할 이유는 필요치 않았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우정이었으며 각자의 삶이 무용담이 되었다.
아쉬운 세월의 흑백사진 같은 발자취와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빈병은 늘어났고, 주점의 공기는 서서히 날 선 파열음을 띠기 시작했다. 취기는 영혼을 붙잡고 있던 감금 장치를 풀어버리는 열쇠였는가? 투박한 입술과 정제되지 않은 호흡 사이로 서로 다른 삶에서 길어 올린 사상들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말의 높낮이는 어긋났고 동의나 이해는 잠시 주위를 맴돌았다.
논리는 서로를 밀어냈고, 경험은 양보를 거부했다.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자리를 박찬 사람은 없었다. 목소리의 톤은 거칠었으나 관계를 베어내는 칼날은 아니었다. 그 언쟁에는 본질과 진실을 바라보는 이성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밤의 가치와 철학은 분명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체득한 성숙한 경험과 이성적 자각, 그리고
취중이었으나 스스로를 성찰하는 사유들이 고개를 들었다. 말의 결은 거칠었으나 이것은 관계를 허무는 균열이 아니라 상대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배려가 되었다.
밤이 익어가자 한 잔 더의 아쉼은 감정이었고, 멈춤은 예의였다. 주점 문을 나서는 순간, 사상의 문은 조용히 닫혔다. 서울의 시린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자 조금 전까지 날을 세우던 말들은 하얀 입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일행은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 발길을 옮겼다. 가로등 불빛의 뒷모습은 실루엣되어 차가운 도심의 속으로 스며들었고 훗날 이 주막에 다시 올 때 오늘의 언어는 더 좋은 인연을 이야기 할 것이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친밀함, 서로를 이해하는 배려와 함께 사상은 깊어져 조용한 신뢰가 이 주막에 스며 한층 성숙한 깊은 우정의 자리가 될 것을 기약한다. 사상은 그렇게 흩어지고 부딪히며 결국 사람 사이에 머물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