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배신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자충의 칼날,

우리에게 관계가 없다면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필연의 관계는 서로에게 기대는 힘이 강할수록 '배신'이라는 아픈 함정에 빠질 확률도 올라갑니다. 결국 배신이란 공들여 보살핀 기대와 신뢰를 산산조각 내는 참담함은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잔인한 역설입니다.
역사는 이 배신의 서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비극적인 전환점을 기록해 왔습니다. 현대사의 비극적 분수령이 된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 사건은, 고대 로마의 시저와 브루투스 비극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닮은꼴로 우리에게 소름 돋는 교훈을 안겨주죠.
그리고 최근 대한민국 정치 한복판에서 윤석열과 한동훈의 관계는 또 하나의 '배신'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에세이’는 단순 과거 사건의 기록이 아닌 관계 속 '신의'란 무엇이고 인간 본연의 욕망이 신뢰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며, 우리가 마주하는 관계의 역설적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깊은 신뢰가 화살 되어 돌아온 윤석열의 회한
한동훈과 윤석열의 관계는 검찰 시절부터 이어진 깊고도 특별한 신뢰로 엮여 있었습니다. 윤석열은 한동훈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극진한 애정으로 묘사하며, 그를 파격적으로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고, 급기야 집권 여당의 당대표 자리까지 밀어 올렸죠. 이는 인재 중용을 넘어, 깊은 애정과 기대가 담긴 행보였습니다.
그러나 한동훈은 '자기 정치 실현'이라는 야망 앞에서, 가장 깊은 신뢰를 보냈던 멘토 윤석열의 '파멸'에 역설적인 '공'(?)을 세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건을 윤석열의 입장에서 보면, 그토록 아끼고 공들여 키운 관계가 무서운 칼날이 되어 자신을 향할 줄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결국 '자기 무덤'을 파는 부메랑이 되는 냉혹한 관계의 현실을 보여주었고, 이 뼈아픈 경험은 무덤에 들어간들 잊혀질까요?
한동훈의 선택은 소신인가, 야망인가
하지만 이 사건을 '한동훈'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는 맹목적인 충성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변화의 시대에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행보를 택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는 멘토의 그림자 아래 안주하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시대적 책임감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말해, 기존 관계의 틀을 깨고 새로운 리더십을 발현하려는 '정치적 독립'의 선언이자, 어쩌면 국민에 대한 '공적 책임감'에서 비롯된 행보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 본질은 접어두고...!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극명하게 갈리는 두 인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과연 배신이란 오직 행위자의 '악의'에서만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큰 명분이나 시대적 흐름이라는 대의 속에서 개인적인 신의가 희생될 수도 있는 것일까? 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관계의 역설적 교훈과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 비극적인 관계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깊이 숙고해야 할 난제에 직면합니다. 리더의 입장에서는 인재를 기르는 동시에 그들의 성장이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차가운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되며 한편으로는 개인적 의리와 공적 소신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아야 하는지, 끝 없는 과제를 부여받게 되죠.
우리가 이 사건들을 통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과연 관계 속의 '영원한 신의'란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모든 관계는 변화하는 시대와 개인의 욕망 앞에서 필연적으로 변모하고 재편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윤석열과 한동훈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시대의 정치적 갈등을 넘어, 우리 각자의 삶에서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신뢰와 배신, 의리와 야망이라는 인간 본성의 뫼비우스 띠를 끊임없이 되짚어 보게 합니다.
어쩌면 가장 잔인한 진실은, 모든 관계의 시작에는 순수한 신뢰가 있었고, 그 끝에는 '배신'이라는 잠재적 위험이 도사린다는 아픈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관계'라는 불가피한 운명 속에서 또다시 신뢰를 쌓고, 다시 상처 받을 각오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는 역사의 고민이었고 우리 모두가 고민할 난제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