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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창] 노년의 행복은 인간이 지향할 궁극의 가치

최종엽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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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인간의 경험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

정부와 경제학자들의 계산이 바빠졌다.
노인 연령을 70세 안팎으로 단계적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급증하는 연금 재정과 의료비 부담, 줄어드는 생산가능인구를 감당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설명도 뒤따른다.

 

그러나 문득,  사람은 언제부터 숫자가 되었을까.

젊을 때는 ‘국가 성장의 동력’이라 불리고,
늙으면 ‘복지 비용’으로 계산되는 사회.
만약 인간의 가치가 생산성과 효율만으로 평가된다면, 결국 공동체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라 기능을 소비하는 체계로 변질될지 모른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요 존엄의 대상

 

칸트는 인간을 결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로 대하라고 말했다.
어쩌면 초고령사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 역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인간은 늙어서도 존엄할 수 있는가.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거의 모든 정보를 손안에서 검색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삶의 깊이는 검색되지 않는다.

배신을 견디는 법,
권력을 쥐고도 타락하지 않는 법,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법,
탐욕이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인지하는 감각….

이런 지혜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긴 세월을 통과한 인간의 내면 속에서 침전되어 나온다.

 

젊음은 속도를 알지만, 

연륜은 방향을 안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삶의 깊이는 여전히 인간에게서만 전수된다.

세월은 육신을 늙게 만들지만,
공동체를 지켜낼 깊은 통찰 또한 남긴다.

 

노인 존중 사회는 예의 바른 사회가 아니다.


노인 존중은 삶의 무게와 시간의 가치를 이해할 줄 아는 사회다.

국가는 지금 노인의 연령을 다시 계산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평생 축적한 경험과 통찰을, 공동체는 어떻게 다시 연결할 것인가.

어떤 사회는 늙음을 퇴장이라 부르지만,
어떤 사회는 그것을 축적된 시간의 귀환이라 부른다.

 

세월은 주름을 깊게 하지만 

사람과 세상을 읽어내는 깊이를 읽어낸다. 
그리고 그 깊이는 때로 법과 제도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균열까지 바라보게 만든다.

어쩌면 미래 사회의 경쟁력은 더 이상 단순한 노동력의 숫자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한 세대가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사회 시스템 안으로 다시 순환시키느냐에 따라 

국가의 품격이 결정될 것이다. 

 

초고령사회는 

단순히 복지 재정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 그리고 경험의 가치를 공동체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문명적 질문이다.

 

생각하자. 

젊음이 세상을 앞으로 밀어가는 동력이라면,
연륜은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힘인지도 모른다.

속도만 있는 사회는 쉽게 흥분하지만,
연륜이 살아 있는 사회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보호받고,
청년은 도전할 기회를 얻으며,
중년은 책임을 감당하고,
노년은 존경받는 사회.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오랫동안 꿈꾸어온 가장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일지 모른다.

노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한 복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어떤 사회는 노인을 비용으로 계산하고,
어떤 사회는 그들을 살아 있는 도서관으로 존중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결국 문명의 품격을 결정한다.

이제 이 질문은 정치권의 계산기를 넘어, 국가가 함께 답해야 할 미래 문명의 과제가 되고 있다.

 

늙음이 더 이상 사회의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비추는 깊은 등불이 되는 사회.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초고령사회는 위기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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