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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삶의 향기
인문

[꽁트] 삶의 향기

최종엽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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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으로 지친 하루의 끝, 정우는 딸 하은이의 평화로운 숨결에서 삶의 본질을 마주한다. 성과와 결과에 내몰린 살벌한 세상 에서,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깨달음. 한 가족의 조용한 밤, 그 속에 스며든 잔잔한 사랑의 이야기...


우는 오늘도 야근을 했다. 전철 안은 땀 냄새, 피곤한 얼굴, 텅 빈 눈동자로 가득 찼다. 손목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최종엽 대표기자

 

그는 조용히, 그러나 한숨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시선은 스탠드 불빛 아래 잠들어 있는 세 살 배기 '하은이'를 향했다. 지은의 등에는 하은을 업었던 포대기가 매어져 있었다.

 

“오늘도 아빠 기다렸어?”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하은이의 새근 거리는 숨소리, 편안한 표정에서 종우는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하루 종일 업무와 씨름한 자신의 모습과 대조적인, '하은'의 평화로운 모습 때문이었다.

 

아내 '지은'은 정갈한 식탁을 준비했다. 따뜻한 국, 소박하지만 맛깔스런 식단이었다.

 

지은: “오늘 하은이가 아빠 오는 길목을 하염 없이 쳐다보더라고.” 

 

종우: “아, 내가 뭐라고, 이토록 고된 하루를 살았는데, 나는 과연  어떤 성취로 사랑 받을 수 있을까.”

 

그 말에 지은은 숟가락을 놓고 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은: “나는 가끔 우리 하은이가 당신이 잊고 지낸,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잊기 쉬운 진실을 비추는 거울 같아요. 저 아이는 존재 자체로 사랑 받잖아요. 그저 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행복의 대상이지요.”

 

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위의 조명은 은은했고, 두 사람의 말에는 삶의 의미가 묻어 있었다.

 

종우: “지은, 사랑은 댓가로 얻어지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우리 존재의 가치는, 어떤 '결과물'에 의해 작용하는 걸까.”

 

지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말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내재된 듯 했다.

 

지은: “사람 사이의 사랑이나 신뢰 그리고 우정은 노력과 운명이 교차하는 순간에 피는 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사랑은,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은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소중한, 이미 사랑 받을 본질적 가치를 가지고 태어났으니까.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고, 이토록 깊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 마음을  전하는 당신 자체가 이미 사랑 받을 자격이 넘친다는 걸 나는 알아요. 당신의 존재가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의미이니까.”

 

식사를 마친 뒤, 종우는 조용히 하은이가 잠든 곳으로 갔다.

 

작고 따뜻한 몸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온기. 종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하은이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다. 

 

하은이는 스르르 눈을 뜨더니, 이내 종우의 지친 눈과 마주했다. 투정 없는 맑은 눈동자가 아빠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종우는 깨달았다. 사랑은 댓가로 받는 게 아니라, 그저 있어주는 것 만으로 행복이고 사랑의 대상이다. 저 맑은 눈빛 속에서, 내가 잊고 지냈던 하은이의 존재에 조건 없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 자신의 모습을  종우는 발견했다.

 

그 순간, 창밖으로 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의 맑은 향기가 종우의 코끝을 스쳤다.

 

하은은 작은 손을 뻗어 종우의 손가락을 꼬옥 잡았다. 작지만 따뜻한 손에서 종우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장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 어떤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존재함'에서 오는 진정한 의미를 느꼈다.

 

지은은 김이 오르는 커피를 정우 앞에 내려놓으며 그 앞에 앉았다. 종우는 하은이의 따뜻한 온기와 지은의 조용한 존재감 속에서,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향기는, 그의 삶 속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존재의 향기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밤, 종우는 처음으로  존재에  대한 존엄의 가치와 인간으로서의  권리 그리고  삶의 향기를 깊이 들여 마셨다.

최종엽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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