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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편지] 침묵은 정의인가, 비겁함인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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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편지] 침묵은 정의인가, 비겁함인가, 아니면…

최종엽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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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앞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해결’보다 공감과 존중’이 먼저.
최종엽 대표기자

우리는 정의를 외친다. 그러나 때로는 가장 강력한 윤리적 선택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간에 깃든다. 침묵은 단순한 ‘말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고, 행위다. 어떤 침묵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지만, 어떤 침묵은 존엄을 무너뜨린다.

 

침묵이 정의가 될 때
어느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지 않기를 바랄 때, 그 뜻을 지켜주는 침묵은 말보다 강하다. 장례식장에서 서로 마주 앉아, 말 한마디 없이도 슬픔을 나누는 그 순간—이것이야말로 깊은 배려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해결’이 아니라 ‘존중’이라고 했다. 이런 침묵은 존재를 온전히 존중하는 윤리의 언어다.

 

침묵이 비겁함이 될 때
그러나 불의 앞의 침묵은 다르다. 억압과 폭력을 보면서 모른 척하는 것, 불법 부당함을 알면서도침묵하는 것—이것은 방관이며 동조고 또 다른 가해다. “자신의 일이 아니다”는 태도는 공동체의 토대를 허무는 결과로 이어진다.
칸트가 말했듯,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여야 한다. 공익에 도전하고 불법을 묵인하는 침묵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인격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자충적 선택이다. 

 

침묵은 맥락 속에 
침묵은 흑백으로 나눌 수 없다. 억압 된 사회에서 침묵은 강력한 저항이 되고, 예술과 영성 세계의 침묵은 깊은 사유의 공간이 된다. 때로 침묵은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전한다. 문제는 그 침묵이 어떤 동기에서 나왔는가, 그리고 무엇을 낳았는가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선택이며, 책임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에 침묵하는가?
그것은 존중과 배려인가,  

아니면  회피인가?

 

침묵은 정의가 될 수도, 비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침묵의 순간, 자신의 내면을 얼마나 깊이 성찰하여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에필로그] 기자가 철학자 월백을 만났다.  

 

<기자> 현장에서 보는 침묵은 참 복잡해. 피해자를 위해서도, 가해자를 위해서도, 때론 스스로를               위해서 침묵하기도 하지.
<월백> 알 것 같아!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침묵이 누구의 존엄을 세우고 누구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가에 있다고 생각해, 
<기자> 그런데 가끔은 말하면 다칠 사람도 있어, 이 경우 윤리적으로 침묵이 나은 선택이 아닐까?
<월백> 가능한 현실이야, 그러나 그 침묵이 불의의 뿌리를 더 깊게 내리게 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방관이고 불의가 되지, 
<기자> 허허, 기자도 철학자가 돼야 겠군.
<월백> 아니, 기자는 기자로서, 철학자는 철학자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과 존엄을 지키면                되지. 다만, 그 선택의 무게를  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
<기자> 그 선택의 무게란 사유가 될 수 있고 자각이 될 수 있으며 용기가 될 수 있겠군, 좋은 지적               이야, 월백! 

최종엽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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