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지주택 40년 잔혹사 ①]서민의 ‘아파트 공동구매’, 어쩌다 토지주 삼키는 괴물이 되었나
오늘날 노후 주택가 골목길에 나붙은 붉은 현수막은 익숙하다 못해 살벌합니다. "내 땅 사수 결사반대", "피눈물 나는 조합 해산하라".

원주민과 외지 조합원, 정체불명의 대행사가 뒤엉켜 수백억 원대 빚더미와 고소·고발을 주고받는 곳. 바로 ‘지역주택조합(지주택)’의 민낯입니다. 평생 일군 집 한 채를 저당 잡히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토지주들의 절규를 마주하다 보면 근본적인 의문이 남습니다.
이 제도는 처음부터 남의 땅을 빼앗는 사냥터로 설계된 것일까?
기록을 40여 년 전으로 되돌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놀랍게도 그 출발선에는 토지주의 피눈물도, 파국의 공포도 없었습니다.
1980년, ‘시행사 거품 뺀 집’을 꿈꾸다
1970년대 후반 서울은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온 인파가 대도시로 쏟아져 들어오며 주택난은 극에 달했습니다. 판자촌 셋방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부 재정은 턱없이 부족했고, 민간 아파트는 중간 마진과 땅값에 금융비용까지 얹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서민에겐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이 절박한 결핍 속에서 탄생한 자구책이 바로 지주택의 모태였습니다. 정부는 1980년 1월 「주택건설촉진법」을 개정하며 ‘무주택자가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하는 조합’을 법률에 처음 명시했습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치면 ‘아파트 원가 직거래(공동구매)’의 탄생이었습니다.
원리는 명료했습니다. 집 없는 서민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직접 땅을 사고, 건설사에 공사를 맡깁니다. 민간 시행사가 중간에서 떼어가는 10~20%의 마진을 덜어내어 시세보다 훨씬 싼값에 내 집을 마련하자는 순수한 취지였습니다.
초기 지주택에는 ‘토지주’ 갈등이 없었다
그 시절의 지주택은 지금처럼 남의 안방을 파고드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초기 사업지는 도심 한복판의 낡은 주거지가 아니라, 도시 외곽의 널찍한 논과 밭, 임야(나대지)였습니다. 땅 주인이 한두 명이거나 문중 땅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권리관계가 복잡하게 얽힐 이유가 없었습니다.
추진 주체는 토지주와 계약을 맺고 깔끔하게 잔금을 치렀습니다. 토지주는 제값을 받고 떠났고, 조합은 빈 땅 위에 반듯하게 아파트를 올렸습니다.
- 토지주: 확정된 매매대금을 받고 매각하는 ‘일반 매도인’
- 조합원: 시세보다 저렴하게 새 집을 분양받는 ‘순수 수혜자’
원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강제수용(매도청구)도, 땅을 맡겼다가 빚더미에 앉는 ‘지주 조합원’이라는 기형적 제도도 없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주택 200만 호 건설’의 흐름 속에서 지주택은 수많은 서민에게 든든한 주거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순수한 자조(自助) 모델, 괴물의 싹을 틔우다
그러나 "서민이 주인이 된다"는 아름다운 구호 이면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숨어 있었습니다. ‘전문성 없는 일반 서민들이 수백억 원대 개발사업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는 순진한 가정이었습니다.
도시가 팽창하며 외곽의 손쉬운 나대지는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어닥치자, 막대한 시세차익을 노린 전문 개발 브로커와 기획사들이 이 헐거운 법망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주택 서민의 소박한 꿈으로 출발했던 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법의 사각지대를 파고든 사냥꾼들의 잔혹한 ‘먹잇감’으로 변질될 운명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인 [제2편: 변질기]*에서는 빈 땅이 사라진 뒤, 전문 브로커와 대행사가 개입해 깜깜이 홍보관과 가짜 보장증서로 서민들을 낚아채기 시작한 암흑기를 추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