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쓴 편지] 지성의 침묵은 중립이 아닌 보신이요 비겁이다.

지성은 알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그러나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다수가 소수를 억압할 때, 침묵하는 지성은 중립이 아니라 보신이요 비겁이며,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다.
"요즘은 뭐만 말해도 상처 받았다고 하잖아. 그럼 우리는 어떤 말이 필요한 거야?"
그는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며 농담처럼 던졌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무거웠다.
나는 말을 받았다.
"지성은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야. 하지만 그 힘을 쓰지 않을 때, 침묵은 책임이 아니라
회피가 돼."
나의 말에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웃음으로 던진 질문이지만, 나의 대답은 그의 웃음을 빼앗아 갔다.
침묵은 미덕인가, 공모인가
우리는 흔히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자유를 넘어 '표현의 책임'이 요청된다. 물론 침묵은 미덕이며 중립일 수 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분노를 삼켜 더 큰 화해를 준비할 때, 침묵은 성숙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러나 시대가 고통 받고, 진실이 왜곡되며, 권력이 폭력으로 작동할 때, 침묵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그 침묵은 회피가 공모가 되고, 비겁이 되며, 보신주의로 변질된다.
윤리적 성찰: 지성의 배신과 책임
지성이란 말해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균형이다. 그러나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지성의 균형이 아니라 지성의 배신이다. 소크라테스는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고 했다. 진실 앞에 침묵하는 지성은 그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이고 그 침묵은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등을 돌린 매정함이며, 자신에 대한 무책임의 선택이 된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도 언젠가 그 질문 앞에 설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침묵의 공범자를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는 몰랐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나는 알았지만, 침묵했다"고 고백할 것인가.
침묵의 증언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증언이 된다. 그리고 그 증언은 후대가 우리를 보는 거울이 될 것이다. 지성의 목적이 진리를 추구하고 드러내는 것이라면, 침묵은 그 목적에 대한 배반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며, 말의 기술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용기다. 그리고 그 용기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