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동포들의 인권문제가 국회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늦은 감이 있으 나 국가정의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다. 중국 동포는 과거 일제의 착취를 피해 우리 고토인 간도 등지로 이주하였고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 정착한 애국지사 및 그들의 자제들이다. 이들은 허허벌판에서 빈손으로 농토를 만들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구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전서숙(瑞甸書塾)과 대성중학교 등 민족학교를 만들어 민족혼 보존을 위한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또 일부는 일본 패망 후 부패한 국민당 정부와 결탁한 토비(土匪)들의 약탈에 대항하고 신중국 건설 과정에서 3500여 명이 희생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은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탁월한 민족으로 인정받아 중국 공민의 지위에 오르게 되며 소수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연변 종합대학 설립과 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한 자랑스러운 우리 동포인 것이다. 열악한 중국동포의 실태 문제는 최근 중국 동포들로부터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이 점점 흐려지고 있으며 고국에 대한 친밀감 보다는 중국인으로서 동화되어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유는 이렇다. 중국 동포들의 한국진출은 1992년 한-중 수교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한국도시정비신문 최종엽 기자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 역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가 1923년 순국한 지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국가보훈처는 황 지사가 안장돼있는 미국 뉴욕 올리벳 묘지 측과 황 지사의 유해 파묘에 전격 합의해 순국 100년 만에 유해봉환이 가능해졌다고 지난 1일 밝혔다. 이에 따라 보훈처는 유해 봉환반 파견을 비롯해 미국 현지에서의 추모행사, 국내 봉환 등 본격적인 유해 봉환 준비 절차에 착수하기로 했다.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면 정부 주관으로 유해 봉환식을 거행, 영현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할 예정이다. 이번 황 지사의 유해 봉환은 순국 100년, 정부의 유해봉환 추진 10년 만에 뜻 깊은 결실을 맺게 됐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황 지사는 1923년 4월 17일 순국 후 미국 뉴욕 소재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로부터 85년이 지난 2008년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목사가 황 지사의 묘소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보훈처는 2013년부터 황 지사의 유해 봉환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올리벳 묘지 측이 유족이 없는 황 지사의 유해 파묘와 봉환은 법원의 결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여 난항을
기자는 최근 대마도 땅을 밟으며 우리 수족이나 다름없는 대마도가 일본영토 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인류 정의에 도전하는 일본의 악질적 행위에 당하기만 했던 조선의 위정자들과 우리정부의 무능이 여행길 내내 오버랩 되었다.일본에서 만나는 왜인들은 하나 같이 친절했다. 양방향1차선의 좁은 도로에서는 한참을 기다려 양보했고 길을 물을 때는 일손을 놓고 동행해주었으며 정직하고 정확했다. 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의식이 선명했고 어디가든 청결했으며 성품도 온유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일본인 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배려 뒤에는 음흉함이 친절에는 사악함이 웃음 뒤에는 수심(獸心) 이, 양보의 이면에는 약탈의 근성이 숨어있음을 역사와 현실이 증명한다.임진왜란 이전의 중세나 고대사는 접어두고 일제 36년사를 조망 그들의 잔혹사를 보면 학살과 겁탈, 방화, 고문, 생매장에 살인경쟁을 벌였고 생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장기를 적출하고 인육을 씹었다. 당한 것이 조선뿐인가. 중국의 난징과 간도에서 동남아 곳곳에서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의 발길 닿는 곳이 범죄 현장이요 야수 사냥이었다. 일본의 잔인성은 사무라이 속성기자는 인본인들의 잔인
작년 7월 1일 반도체 핵심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로 우리 국민의 대일 감정이 급속히 얼어붙었고‘일본제품 불매운동의 여파로 한국인이 즐겨 찾는 대마도의 뱃길도 한산했다.기자는 일본 수출규제로 표출된 한.일 갈등의 일본 민심을 살핀다는 프로젝트로 구정 명절을 맞아 민족적 회한이 깊은 대마도를 찾았다. 날씨는 포근했으나 찌푸린 날씨와 뱃창을 때리는 사나운 파도는 아베정부의 변덕스럽고 사악한 성품을 보는 듯했다. 배는 점점 일본을 향하는데 기자의 생각은 역사 속에서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다.대마도를 향한 배는 빠른 속도로 현해탄에 진입했다. 443명 정원의 ‘오션플라워호’는 70여명을 태워 한산하다. 기자를 포함하여 함께한 사람들 모두 자유한 몸으로 여행이 종료되면 가족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일제에 나라 빼앗기고 강제 감시받으며 어떤 사람은 탄광으로, 어떤 이는 군수품 공장으로 또 위안부와 총알받이로 끌려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과 사의 갈림길,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 누구의 책임인가, 역사의 아픈 교훈을 잊고 두 진영으로 갈라져 싸우는 우리 정치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배가 멎은 히타카 항은 한국의 작은 포구를
진시황은 조,한.위.초.연.제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 후 만리장성 축조와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에 이어 아방궁을 지어 10.000여명의 궁녀를 곁에 두었고 역사, 농, 의학관련 서적 외 모든 책을 불사르는 분서(焚書)와 460명의 유생을 구덩이에 생매장하는 갱유(坑儒)를 저질렀는데 역사는 이를 분서갱유라 칭한다. 그는 또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구하는 한편 사후(死後)를 대비하여 대비 병마용 무덤을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다 할 것이다.서복과 진시황제제나라 사람 서복은 방사(方士)로서 박식 다능하고 다양하고 의학, 천문, 항해 등의 지식에 통달했는데 이런 이유로 진시황으로 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6국을 통일한 후진시황은 불로장생하기를 원했고 서복은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에 신선이 있다는 조서를 올렸다. 이에 시황은 3천명의 동남동녀와 3년분의 식량과 피복, 의약품 등을 지원했다.대규모 선단을 이룬 서복일행은 불로초를 구해 떠났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후환이 두려워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되어있다.아내로부터 정보를 듣고 탐사를 계획하다 ▲ 서복의 동도 출항선중국 강소성은 전남지역과 같은 위도상에 위치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