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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영웅 최재형을 아시나요

러시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민족의 영웅 최재형
기업인, 교육자, 독립운동로 역량 발휘

독립운동의 영웅 최재형을 아시나요?

 

  이 글은 최재형 기념사업회 문영숙 작가 초청 전주최씨 문중행사를 통해 알게 된 내용으로 11세 가출로 시작하여 러시아를 무대로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일대기를 문영숙 작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본지에 게재한다.

 

  러시아 연해주 등에 32개의 학교를 설립 민족혼의 제련소 역할과 민족계몽을 위해 해조신문, 대동공보사, 권업회신문를 창간하여 운영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과 외교부장을 비롯 대형기업가 활동한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담았다.

 

  선생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다. 러시아식 이름은 초이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며, 우리이름은 최재형(崔在衡), 별명은 난로처럼 훈훈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최 페티카(Петька),로 불리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는 11세에 가출 해변에 쓰러진 소년 최재형이 러시아 선장을 만나게 되며 선장의 배려로 배를 타고 전 세계를 일주하며 견문을 넓히고 세계관의 눈을 뜨게 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익혔고 17세 때는 통사로 일하다 시베리아의 도로 건설책임자로 발탁되며 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적으로 선생은 러시아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게 된다. 그후 선생은 러시아 행정기관의 장으로 선출된다.

 

  한일합방 후 러시아 연해주일대의 독립 운동은 최재형을 빼놓고서는 기록할 수 없다 할 정도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주역이다. 그동안 사학계에서는 조명받지 못하다 19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주목받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만주를 중심으로한 김구, 안창호, 미주의 이승만을 빼놓을 수 없듯이 러시아와 연해주 독립 운동 역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바로 최재형 선생이다.

 

  선생은 1906년 독립운동 활동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범윤에게 군자금 1만3천루불의 거액을 지원하였다. 1908년 그는 자신의 집에서 독립군 지도자 수백 명을 모아 러시아 최초의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결성 자신은 회장이 되고 부회장에 이범윤,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연해주에서 군대를 양성 일본군을 습격하는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1908년 2월에는 안중근을 포함한 의회 소속 12명이 연추에 위한 선생의 집에서 동의회 정신 실현을 위해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 처단을 3년 내 이루지 못하면 자결하겠다는 맹서로 약지를 절단하고 ’대한독립‘의 글자를 피로 세기며 단지동맹을 결의하였다.

 

국외 최초의 의병단체 동의회 구성

 

  선생이 창업한 ’대동공보사‘는 1019년 10월 이토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중근과 작전회의 및 무기 등을 지원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이때 선생은 재판에 대비해 국제변호사를 선임했으나 무시당했으며 일본 헌병은 배우세력으로 최재형을 지목한다. 1910년 6월 일사불란한 지휘체제를 위해 분산된 독립단체를 통합하는 ’13도의군‘을 창설 하였으며 도의군의 목표는 국내의 일본군을 몰아내는 임무였다.

 

독립운동 3대 신문인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권업회 창업

 

  최재형의 동의회 취지문과 안중근의 ’인심결합론‘을 모토로 한 해조신문은 1908년 2월 26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창간되었다. 신문의 발행목적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단결과 의병활동지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동포계몽을 위한 활동을 다루었으나 일본군의 탄압으로 그해 5월 26일 75회를 끝으로 폐간 되었으나 1908년 11월 선생은 대동공보를 다시 창업하여 운영하였고 일본군의 정보를 빼내 도의군에 공급하였으며 이토히로부미의 처단을 계획하고 무기의 지원을 하게 된다. 1912년 4월22일 순우리말의 ’권업회신문‘이 발행되었고 신문제정은 최재형이 담당했으며 국권회복과 민족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민족지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의 거점 신한촌

 

  1911년 중국 동북3성에 발생한 콜레라가 독립군 활동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이유로 러시아정부는 한인들을 시 외곽인 아무르만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지명을 새로운 곳에서 대한민국을 일으킨다는 뜻에서 ’신한촌‘이라 명명했고 초기 1500명에서 1915년에는 1만명이 넘는 한인들로 북적였고 ’서울의 거리‘도 탄생했다.

신한촌에는 대한광복군 정부, 대한민국의회, 권업회, 노인동맹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을 설립하였고 최재형, 홍범도, 안창호, 신채호 외 많은 독립투사들이 함께 활동하였으며 3.1운동 1주년을 맞이 독립문을 세우기도 하였다.

 

  권업회란 한인들의 실업을 활성화하자는 취지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1911년 6월 57명의 한인 지도자들은 신한촌에 모여 권업회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초대회장에 최재형, 부회장에 홍범도가 선출되었고 의병단체와 애국계몽 단체연합으로 구성되었다. 권업회는 1912년 신한촌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주도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이동명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였고 최초의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만들고 국무위원을 선출했다. 초대내각의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 김규식, 법무, 이시영, 군무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이 선출되었으며 4월 23일 서울에서 13도 대표 23명 이름으로 선언문을 발표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선출 민주공화제의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노인동맹단과 4월 참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곽단체로 연통제 아령총판부를 연해주에 설치하고 최재형을 총판에 부총판을 김치보로 하였다. 1920년 4월 브라디보스톡에 주둔한 일본군은 우수리스크 거주 일본인들이 러시아적군에 희생당하자 군대를 동원 대대적인 학살을 하였고 학교와 주택을 불태웠다.

당시 러시아 혁명군 지도자 세르게이자조는 기관차에 감금되어 불태워 죽임을 당했고 최재형 선생은 엄주필, 김이직, 황경섭등과 체포되어 무수리스크에서 재판없이 총살 당하며 영웅적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