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무문'의 길 뼈대 굵은 한 사대부의 가문을 깊히 들여다보니 열병을 앓고 있는데 우리의 정치판과 꼭 닮은 꼴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래가 맑은 법인데 상류가 흑탕물이니 전체가 혼탁하고 대들보가 썩 었으니 집이 온전할리 있겠는가. 대도무문의 효시는 송나라의 선승 '혜개'의 말과 글을 묶은 무 문관(無門關)에 “대도에는 문이 없으나 갈래 길은 천이로다, 그 러나 이 문을 지나면 하늘과 땅을 홀로 걸으리"라 하여 정도를 걸으면 세상에 거칠것이 없다고 설법하였다. 쉽게말해 대도무문이란 삶의 목표는 원대한 꿈과 포부를 갖으며 이를 실현함에 있어 정도를 지키며 공과 사를 가려 의롭게 사는 삶으로 정의된다. 거산 김영삼의 대도무문 대도무문하면 김영삼 전대통령이 떠오른다. 그의 아호는 큰산(巨山) 이며 좌우명은 大道無門이었다. 거산은 스물여섯 약관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14대까지 아홉 번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대통령의 꿈을 실현한 인물이다. 그의 정치역정은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대모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건부터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시 초산 테러를 당했고, 유신시절인 1979년 뉴욕타임스 회견을 이유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5공 시절에
최근 중국 동포들의 인권문제가 국회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늦은 감이 있으 나 국가정의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다. 중국 동포는 과거 일제의 착취를 피해 우리 고토인 간도 등지로 이주하였고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 정착한 애국지사 및 그들의 자제들이다. 이들은 허허벌판에서 빈손으로 농토를 만들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구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전서숙(瑞甸書塾)과 대성중학교 등 민족학교를 만들어 민족혼 보존을 위한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또 일부는 일본 패망 후 부패한 국민당 정부와 결탁한 토비(土匪)들의 약탈에 대항하고 신중국 건설 과정에서 3500여 명이 희생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은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탁월한 민족으로 인정받아 중국 공민의 지위에 오르게 되며 소수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연변 종합대학 설립과 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한 자랑스러운 우리 동포인 것이다. 열악한 중국동포의 실태 문제는 최근 중국 동포들로부터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이 점점 흐려지고 있으며 고국에 대한 친밀감 보다는 중국인으로서 동화되어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유는 이렇다. 중국 동포들의 한국진출은 1992년 한-중 수교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