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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탐방] 전주최씨 평도공파, 임시 대의원 총회......새 회장에 최운식 전 이화여대교수 선출

 

한국도시정비신문 최종엽 기자 = 전주최씨 평도공 종중은 29일 청량리 평도공 사무실에서 대의원과 임원 45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 총회를 열고 새회장에 기호 2번 최운식 전 이화여대교수를 선출했다. 총 선거인수 35명 중 21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최운식 당선인은 화합을 모토로 상식과 기본이 통하는 건강한 종중을 만들겠다고 전제하고 용인시 공세동 1번지 종중 사패지 34만평에서 추진되고 있는 골프장 사업은 훌륭한 전문위원들을 위촉하여 옳바른 의사결정으로 왜곡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최운식회장은 1941년에 출생(82세) 하여 서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4대학에 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후 평생 교육자의 삶을 살아왔으며 국정원을 비롯한 여러 부처의 국정 자문역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전주최씨는 평도공으로 부터 대대로 이어오는 명문가문 

 

전주최씨 평도공 문중은 국내 성씨가운데 명문가문의 자긍심이 높다. 전주가문의 중흥은 평도공 최유경에서 시작된다. 유경의 아들 6명은 모두 명망을 떨쳐 명문가의 성세를 이루었고 후손들은 6개 小派를 형성 평도공파로 이름한다. 

 

평도공손의 종토는 경기도 용인시 공세동 1번지 (자봉산)로 1413 태종13년 최유경이 71세로 졸하자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고 이 때 자봉산 일대 하사받은  사패지에 유경의 묘역이 조성되었고 경기도 문화재 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봉산의 전주최씨 평도공 묘역에는 최유경과 그의 아들 중 사규 (社規)·사강(士康)·사용(士庸)이 함께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장남 사위(士威)가 잠들어 있고  묘역 입구에는 전주최씨 평도공파 재실 효렴사(孝廉祠)가 위치하고 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은 전주최씨 평고공에서 유래 했다. 최유경은 진천(생거)에 살았으며, 사후에는 용인에 묻혀 영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겼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뜻은 단순히 유경이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용인에 잠들었다는 의미를 넘어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모을 모시고자 했던 최유경의 효행심에서 비롯한 것으로 학자들은 풀이한다.

 

최유경(崔有慶: 1343-1413)의 삶

 

최유경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민왕 9년(1359), 18세의 나이에 벼슬에 올라 전법사총랑, 양광도안렴사를 거쳐 서북면 전운사겸 찰방으로 재임중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감행되자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최영이 실각한 뒤 창왕의 즉위와 함께 밀직부사가 되었다.

 

이성계가 즉위 시 최유경의 위화도 회군을 우왕에 고변한 것이 조정에서 논란이 많았으나 이성계는 오히려 최유경의 충의를 칭찬하여 개국원종종신에 서훈했고 경상도관찰사, 경기·충청도 체찰사로 왕정을 도왔다. 태종 1년(1401)에는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4년에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최유경은 조선 건국 당시 축성도감(築城都監)의 직책을 띠고 서울의 도성을 쌓았으며, 국보 제1호인 숭례문(崇禮門)과 호남 제일의 문루인 풍남문(豊南門)을 건립하였으며 숭례문상량기 가 국립박물관에 전한다. 

 

 

‘효행(孝行)’과 ‘청렴(淸廉)’의 정신은 후손들의 정신으로  

 

평도공 최유경은 효성과 결백 청렴에 세종이 감동하여 친히 효자정문을 내렸고 태종으로부터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그의 효자정문은 드물게 3곳에 있는데 충북 청원군 대율리에 정문이, 용정리에 직산십이정문(稷山十二旌門), 진천에 6남 사흥(감무공)의 정문과 있다.

 

큰 아들 사위 또한, 아첨할 줄 모르고 정사는 오로지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청빈한 관리였다. 평도공의 자손 중 효자와 열녀가 12명이나 된다. 충남 천원군 입방면 용정리에는 있는 12정문이 사실을 입증한다. 

 

상신·대제학·청백리가 모두 평도공 그의 자손에서 나왔다. 대표적 인물은 최명길(崔鳴吉)이다.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숙종 때 영의정), 최석항(崔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최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또 최군옥의 후손인 문충공파에서는 고려 말기에 ‘두문동(杜門洞 72현’에 들어 있는 최양(崔瀁)이 있다.

그 외에도 고려 말기에 좌참찬을 지낸 최부(崔府), 태종 때의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최철견(崔鐵堅)과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최기필(崔琦弼)·최균(崔均)·최경행(崔敬行) 등도 있다.

 

최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영웅 최재형 선생이 전주최씨 평도공의 후손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