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엽칼럼] 매국노 이완용의 비극

2023.11.29 12:10:45

 

여의도 정치와 주변의 상황을 보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입니다.

 

그는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팔았고 사법권을 일제에 넘겨준 기유각서와 정미7조약을 통해 병권을 넘겨줬으며 한일 병합 조약으로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역사에 길이 남을 매국노입니다.  그는 나라 팔은 댓가로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대라우치 통감의 은사금 15만원(약300억원)을 받아 호의 호식를 누렸습니다.

 

어린시절 이완용은 총명하여 우봉이씨 문중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는 10살 때 세도가 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인 이호중의 양자로 입적하여 출세가 보장된 사람이었고 25세에 과거(중광시)에 급제 할 때 고종이 악공을 보내 그에 대한 관심을 표했습니다. 그는 황제의 총애로 3년 만에 정3품에 오릅니다. 

 

이완용은 30세에 초대 주미공사의 일원인 참사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어 2년 6개월간 국제 외교을 경험을 쌓고 친미주의가 되어 귀국합니다. 그리고 5년 후인 1896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될 때 아관파천의 주역으로 고종이 신변을 보호하는 충직한 신하였고 이를 계기로 친러파가 됩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이완용은 본격적으로 친일파가 되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 서게 됩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자 총독 이토가 참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조약위반을 호통치자 이완용은 내각 대신들을 대동하고 고종에게 달려가 칼을 빼들고  “天道에는 춘하추동이 있고 / 人事에는 동서남북이 있으니 / 천도와 인사는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지 않으면 / 실리實利를 잃고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라 훈계합니다.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왔다갔다 갈지자의 변심과 변질의  천박한 인격과 쓰레기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의 천륜을 꺽은 이완용

 

이완용의 아들 ‘명구’가 왜국에 유학 후 귀국 하여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자신의 처 임씨를 끌어안고 누워있는 것을 보고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며 자살하자 며누리를 첩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황현의 매천야록에 남아 있습니다. 

 

자, 그러면 나라 팔은 댓가로 후작의 벼슬과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된 이완용의 삶은 성공일까요? 아니면 행복인가요.  

 

1909년 12월 22일 지금의 명동성당(종현천주교회당)앞에서 벨기에 국왕 추도식에 참석하려는 이완용에게 군밤 장수로 가장한 이재명으로부터 칼 테러를 당합니다. 이로 인해 의사 이재명은 약관 27세 아까운 나이에 처형되었고 죽기 전까지 폐혈증으로 고통 받습니다.

 

1926년 2월 12일 토지 1억 3천만 평과 거금을 남겨놓고 68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사망 다음 한 신문은 1면 톱기사로 "한국병합의 괴뢰가 죽었다, 이완용이 염라국에 갔으니 염라국 팔아먹을까 걱정된다’고 적었다. 

 

동아일보 는 14일자에  “그도 갔다, / 팔지못할 것을 팔아서 / 능히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자 / 이제 영원히 천벌을 받으리라”

 

조선일보는 또 "한일합병의 괴뢰가 되어 / 그의 간흉 강퍅함은 권세에 영합하고 / 정세 흐름을 타는 탁월함은/ 친미, 친러 친일파로 돌변하고 / 급기야 2천만 민족에 반역하는 / 큰 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고 만고역적의 죄를 고했다

 

익산시 낭산면 이완용의 묘지는 증손에 의해 파묘되어 유골은 개천에 뿌려졌고 우봉 이씨는 이완용을 파족하고 역사는 민족의 반역자로 만대에 기록할 것입니다. 

최종엽 기자 dkcncc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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