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엽의 인문, 역사탐방] 전주최씨 중시조 최유경의 생애와 철학 (하)

2023.11.14 06:36:01

                                     

 

역사를 알아가는 것은 역사 속 인물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유경은 위험을 자청한 회군 고변의 충정과 용기 그리고 언제나 옳고 그름의 경계에서 명분을 선택하는 곧은 기상과 지조의 삶을 산 선비요 정치인이며 관료였다. 또 그런 유경을 아끼고 품어 국가 발전에 활용한 이성계의 임금다움이 만들어낸 전주최씨 평도공 이야기를 전편에 이어 게재한다.

 

고려말 시대적 상황은 원과 명이 격돌하는 혼돈 속에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잦은 출몰로 극도의 혼란 속에서 권문세가들의 매관매직과 토지 약탈 등의 부패가 겹쳐 백성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정도전 중심의 급진개혁파들은 나라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세력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들은 왕조를 유지하며 제도를 개선하고자 했는데 최유경은 온건 개혁에 뜻을 두었다.

 

최유경의 위화도 회군 고변 사건은 큰 파장을 부르며 최영과 우왕, 창왕 조민수 등이 처형되며 고려가 기울자 길재 원천석 등은 망국의 설움을 ‘시조’로 풀어내며 한을 달랬고 동방의 대유大儒로 불리는 ‘이색’은 백설이 잦아진 곳에 구름이 머물러라 /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더라,를 노래했다.

 

이 무렵 최유경이 이색에 보낸 시조적 서한에는 “천지가 번복翻覆하니 어찌 된 일인가! / 죽기를 원하지 않으나 고려에서 죽지 못하고 오늘을 보니 / 살았으나 죽으니만 못하다, / 실로 정몽주와 길재에 죄인이 되었으니 / 살아서 순일純一을 어떻게 대하며 죽어서는 달가‘達可’를 어찌 대하랴! / 오직 우리 두 마음 서로 비춰볼 뿐이라” 하였는데 윗 문단에서 이색의 시 끝 소절과 맥락을 같이하며 고려와 임금에 대한 충정과 망국의 회한과 인간적 한계에 대한 탄식의 한 호흡임을 알 수있다.

 

당시 최유경이 처한 상황은 신진개혁세력에는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역시 큰 인물로 회군 시 최유경의 고변은 아프지만 임금을 향한 충정을 옳게 보았고 최유경의 청렴 강직한 성품과 요동 정벌 시 서북면 전운사로의 활약상이 높게 평가되었으며 특히 1377년(우왕3년) 이성계가 도원수를 시절 부원수로 왜적 소탕을 함께한 인연이 최유경에 대한 각별한 신뢰로 작용했다. 

 

최유경과 조준은 동서지간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를 이끄는 쌍두마차는 정도전과 조준이었다. 조준은 신흥 무장세력의 실력자였고 이성계를 임금으로 신왕조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1374년 우왕 때 과거에 급제, 관직에 나온 후 이인임이 실권을 잡자 은둔 후 위화도 회군 직후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를 보필 좌청룡 우백호의 역할을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최유경과 조준은 동서지간이다. 이숭李崇 슬하에는 4명의 딸이 있다, 그중 둘째가 최유경에 시집오고 셋째 딸이 조준의 아내다. 하여 태조와 조석으로 마주하며 정사를 논하는 조준은 평도공의 아랫 동서로 최유경을 회유하였고 조정 대신을 설득하여 유경의 등용을 권면하였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문정공 최재에서 아들 최유경으로 이어지는 大家門의 뼈대와 공명정대한 일 처리로 仁政을 베푼 업적의 평가와 1377년(우왕3) 도원수와 부원수로 만나 왜적 소탕과정의 인연에서 유경의 인물됨을 발견했고 무엇보다 신왕조에서 최유경을 회유 등용한 것은 정국 안정을 위해 최유경의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조선국에서 최유경의 활동

 

조선 건국 후 2년이 지난 1394년 태조가 최유경을 조선건국원종공신으로 삼고자 할 때 좌우 대신들이 무진년 회군 사실을 들어 반대주장을 하였으나 태조가 그의 충의를 칭찬하고 사신으로 하여금 최유경에 술을 하사 격려하며 밀직부사(정3품)로 등용 했다가 동지밀직사사(정2품)으로 승진 보직했다.

 

1395년(태조4년) 4월 지중추원사. 중군동지절제사를 제수하고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겸임했다. 이듬해 1396년에는 한양도성 축성과 성문 건축의 책임을 맡았는데, 오늘날 세계적 자랑거리인 서울 도성과 국보1호 숭례문을 탄생시킨다. 1397년에는 지중추원사로 도체찰사에 임명된다.

 

한양 축성을 성공시킨 유경은 태안에 내려가 운하를 여부를 검토하라는 명을 받는다. 당시 충청, 전라, 경상도 지방의 곡식과 물자를 서울로 운송할 때 물길을 이용했다. 그러나 간만 차가 심한 관계로 물살이 빨라 배가 자주 난파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운하 건설을 위해 천문 지리 토목에 능한 최유경을 보냈다. 현지를 돌아본 유경의 보고는 화강암층이 두터워 공사가 불가하다 하였다.

 

1398년 9월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이 되었다. 평소 최유경을 꺼려하던 자들은 이때를 노려 시기 모략으로 유경을 끌어내리고자 했다. 그러나 정종은 오히려 유경의 사람됨을 칭찬하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성품과 일화

 

그가 졸한 후 시호를 ‘평도(平度)’라고 하였는데, 성품이 곧고 대범하여 굽히거나 아첨함이 없었고 사람들은 그를 청렴하고 강직하다 칭찬했다. 태조와 정조임금도 그의 충직(忠直)함을 항상 칭찬하였다.

 

태종의 즉위와 더불어 사헌부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육조의 천거로 참찬의정부사가 되었으며,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돌아왔다.

 

그 후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하신 부친의 와병을 돕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대나무 정자(죽정)'를 짓고 지성으로 봉양했다. 부친(崔宰)이 졸하자 묘역 앞에 초막을 짓고 3년을 봉양한다.

 

최유경은 정치 외교는 물론 성리학을 바탕으로 음양, 천문, 지리, 토목과 건축에 능했고 이는 어떤 보직을 받아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배경에는 타인과 구별되는 탁월함이었고 이는  태조와 정조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그는 또 청렴한 성품과 사심 없는 일 처리는 수 많은 정적들의 시기와 무고에도 승승 장구 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는 나라에 충성을 다 했고 효행이 남달랐으며 백성을 禮로 대했다. 사욕을 멀리하고 명분을 따져 행하며 신의를 지켰다. 최유경의 이런 원칙에 지혜를 입힌 삶은 600년이 지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忠,孝.禮.智.信을 교훈하고 있다. 또 큰 인물 최유경의 배경에는 충정과 인품, 역량을 신뢰하고 신왕조 세력에 의한 시기와 모략에도 변함없이 그를 믿고 신뢰하며 중임을 맡긴 태조와 정종의 임금다움이 돋보인다.

 

공사를 구별 못하고 직위를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고자 눈이 충혈된 군상들 지천인 세상에 언제나 경계의 중심에서 초지일관 청렴 강직으로 관료의 모범을 보인 최유경 선생의 인품이 그리워 진다.

 

최종엽 기자 dkcncc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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