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엽의 인문역사탐방] 전주최씨 중시조 평도공의 삶과 철학 (상)

2023.11.06 08:52:27

 

늦가을 주말, 붉게 물든 단풍과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고려의 패망과 조선건국의 광풍 속에서 왕에 대한 충절과 초지일관 대의명분적 삶을 산 전주최씨 ‘평도공’의 선비정신을 추적했다.

 

최유경이 조전사助戰使로 요동정벌군을 지원하던 중 이성계의 역심을 알고 위화도를 출발 필마단기로 500리길 평양에 머무는 우왕을 향해 말을 몰았다. 이때 최유경은 말 위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개인 신상의 유불리나 가문의 안전보다 나라의 운명과 왕의 안위를 더걱정하며 몸을 던졌다.

 

왕을 제거하고 국가를 전복하는 역모, 피의 바다가 예고된 무서운 사건 현장에서 조전사 겸 양광도(경기,충청,강원)의 백성과 지방관을 규찰하는 찰방직의 최유경은 고려정세를 누구보다 꿰뚫고 있었다.

당시 이성계와 조민수에 주어진 병력 54.830명(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1,600명 말 2만 1,682필)의 대병력이고 개경수비대는 고작 7천명이었는데 때마침 왜구의 출몰로 업친데 덮쳐 최영과 이성계와의 전력은 계란에 바위격이다. 그러나 공은 평양에 머무는 우왕에 고변하고 그를 호위하여 평양에서 500리길 개경으로 돌아왔다, 대의大儀를 따랐으나 죽음을 부르는 무서운 일을 자청한 것이다.

 

최유경의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죽정(竹亭), 시호는 평도공으로 고려 예종 때 시중을 지낸 최순작의 8대손이며 그의 부친 문정공 최재는 중대광 감찰대부를 지냈는데 중대광은 삼중대광과 함께 왕 바로 아래의 품계이며 무신정권의 최고권력자 최충헌이 삼중대광이다.

 

공은 전주최씨 중시조로 그의 후손에는 정승 3명, 청백리 5명 대제학 3명 공신 5명 충신8명 효자56명 열녀 19명 문과급제 100여명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완성부원군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1등공신이며 병자, 정묘호란의 전란을 수습한 인물로 영화 남한산성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은 숙종 때 8번의 정승을 지냈고 그밖에 조선 역사에 걸출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최유운선생의 남곡재)

 

평도공 최유경의 생애

 

최유경은 고려 충혜왕 4년(1343년)에 문정공 최재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의 성품을 닮아 기개가 곧고 씩씩한 기상과 두뇌가 명석하여 공민왕 9년 18세 나이에(1361년) 음서와 과거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올랐다.

 

공민왕10년(1361년)에 윤충좌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점령되자, 판내부사로서 왕을 모시고 호종한 공으로 신축호종1등공신에 서훈되어 우왕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를 빌미로 그는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며 관직을 매매하며 넓은 토지를 불법 점유하는 등 방종을 일삼았다. 이에 1375년 최유경은 장령(사헌부)으로 자리를 옮기는 즉시 대사헌 송천봉(宋天逢)과 힘을 함쳐 윤충좌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고려 때 소금은 철과 함께 군사·경제에 중요한 품목이었으며 국가 재정을 위해 각염법이 시행되었다. 홍무(명태조연호) 임자해(1382년)에 권문세가들이 소금을 독점하여 나라 재정은 물론 민심이 흉흉했다. 이에 최유경은 엄청난 권력자 윤충좌의 불의에 맞서 해법을 왕에 上書하여 모든 소금을 의염창에 속하도록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제도를 바로 잡으며 임금을 안심시켰다.

 

우왕 때 선단 200여척에서 500여척씩 거느린 왜구들이 연례 행사처럼 출몰하여 고려를 수탈했다. 설상가상 북쪽에서도 수만에 달하는 오랑케의 침략으로 고려조정을 패닉에 빠져있었다.

1383년(우왕9년) 왜구들이 옥주(沃州)·보령 등의 고을을 무력화 시키고,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이에 공주 목사 최유경이 판관 송자호(宋子浩)와 함께 구점(仇岾)에서 왜구와 싸워서 물리쳤다.

<고려사 설장수전> 

 

홍무 8년 1385‘ 을묘년에 최공이 전법총랑典法摠郎(감사관)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이사충의 노비가 주인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치자 이사충이 고소하여 여러 차례 고문하였으나 실토 하지않자 최유경이 고문보다 이치를 따져 물으니 이에 실토하여 해결하였다.

 

1388년 고려사에 유명한 무진피화사건에 최유경의 이름이 오른다. 세도가 이인임의 일파 임견미가 왕명을 우습게 여기며 백성들의 토지를 약 할 때 힘없는 소지주들 땅 뿐 아니라 호족인 조반의 토지까지 빼앗은 잔악무도한 사실이 드러나자 최유경은 양광도(경기 강원 충청)안찰사로 우왕의 신임과 막강한 사병을 거느린 임견미를 비롯 염흥방 반익순, 도길부 등 뿌리깊은 악의 뿌리를 제거했다. (안찰사 : 각 도의 수령을 감찰하고 민생을 살피는 일)

 

고려멸망과 조선건국 .

 

1388년 위화도회군시 최유경은 개인적 안일이나 출세보다 무섭고 위험한 대의와 충정의 길을 선택한다. 이 사건은 최유경 일생일대 최고의 위기였고 상황에 따라 멸문지화를 각오해야 했다.

이성계 즉위 후 최유경은 목은 이색을 만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한탄 하며 속세와 인연을 끊고자 할 때 태조는 공의 충절과 능력을 높이 평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서훈하고 ‘밀직부사상호군’의 직위를 하사 할 때 대신들이 좌우에서 우왕에 고한 사실을 들어 반대했으나 태조는 오히려 공의 충의를 칭찬하였다.  

 

참고자료 : 최유운선생의 남곡재. 고려사. 태조실록, 국조인물고 등 

 

다음호에 하편이 계속된다. 

 

 

최종엽 기자 dkcncc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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